나이 서른 여덟(만으로 서른 일곱)에 예비군 4년차, 향방작계 훈련에 가기 위해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짜피 향방작계에 가면 몇시간을 가만히 대기해야 하므로 책꽂이를 훑다가 이 책을 집었다. 문고판형의 얇은 크기가 건빵주머니에 들어가기 딱 좋다. 그런데 내가 이책을 산적이 있던가? 아내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아니란다. 책을 후루루 훑으니 노란 형광팬자국이 드문드문 보이니, 아마 장인어른이 보시던 책이었을게다.
정약용, 훌륭한 학자였지(물론 나는 아직 그가 지은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심지어 정약용 관련 책도),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천주교 연루로 오랫동안 유배생활. 자산어보를 지은 정약전의 형이었던가 동생이었던가. 예전 대학 동아리에서 몇번 MT를 갖던 능내에 있던게 생가였던가? 하지만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지.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마과회통... 정약용에 관해 내가 알고있는 사실들이 후루루 떠올랐다.
소집지에 가서 총과 삽을 받고 한 20분 걸어서 작은 언덕의 진지에 도착하여 대충 삽집 몇번 낫질 몇번 하니 두시 반. 아..세시간을 여기서 빈둥거려야 하는구나.
책을 집었다. 아이폰을 잃어버리기 전이라면 아이폰으로 웹서핑을 하거나 트윗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겠지.
1762년에 태어나 1800년에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나 18년간 유배생활 1818년에 유배가 풀려 18년을 살다가 별세.
아무래도 인상깊은 글들은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글이다. 용맹정진 학문에 힘쓰다가도 가족에게는 애틋하고 혹여나 어린 자식들이 인생을 자포자기하지나 않을지 걱정하며 항상 훈계한다. 폐족.. 근래 많이 듣던 말이었지.
울분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엮은이의 선택이었는지, 다산의 말따나마 "편지 한 통을 쓸때마다 두 번 세 번 살펴보며, 이 편지가 번화가의 큰길가에 떨어져 내 원수가 펼쳐보아도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인가 하고 기원한다"고 할정도의 조심성과 두려움 때문인지..
장천용이란 인물에 대한 짧은 글도 흥미로왔다. 그림과 음악에 놀라운 재능이 있으나 이를 펴보지 못하고 술과 기행을 일삼은.. 그러면서도 풍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항상 남편을 헐뜯기만 하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다산은 6남 3녀를 가졌으나 4남 2녀가 어려서 병으로 죽고 2남 1녀만 장성하였다. 어려 죽은 자식들을 그리며 쓴 산문을 읽으며 가슴이 아린다. 특히 1799년에 태어나 채 3년을 못살고 죽은 아이.. 태어난지 얼마후 신유사옥이 있고 유배를 갔으니 3년 삶동안 아버지와 같이한것은 1년뿐. 유배지에서 소라껍질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선물을 받기전 홍역을 앓았고 소라껍질을 받고 며칠 후 하늘로 갔더랬다.
역시 유배생활중인 형 정약전에게 몸보신을 위해 들개를 잡아드세요 라며 들개를 잡는법과 요리하는법을 편지에 보낸것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최근 덧글